조국은 누구일까? 김동초 칼럼


조국과 문재인의 무능과 음융함 이 오늘의 지옥을 만들었다.

|뉴스100 김동초 기자 |

 

 

요즘 조국혁신당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지율이 17%까지 치솟았다. 민주당의 위성정당(더불어민주연합)을 제

쳤다. 먼저 제3지대를 꾸렸던 개혁신당이나 새로운미래 등은 2~4%대로 지지율이 저조하다. 박스권에 갖혔다.

 

그렇다면 조국은 누구일까! 첫 느낌은 이렇다. 윤석열이 검찰총장시절 한 가족이 도륙난집안이다. 사실이다. 그만큼 윤석열을 증오할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권종식과 검찰독재타도를 부르짖어 좀더 점잖은 민주당의 아쉬움을 달랬다. 다른 한편 중도층을 움직여 엄청난 돌풍과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조국은 오늘의 윤석열 정권을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문정권 때 추미에 장관에게 극도로 무도한 하극상을 일으킨 윤석열을 옹호했다.

 

문제인이 그랬다. 윤석열은 문재인정부의 검찰총장이라고 했다. 정치에는 뜻이 없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문재인의 그말이 윤석열총장에게 엄중한 경고라고 해석했다.

 

정말 터무니 없다. 그명석하다는 조국의 머리는 그정도의 판단력 밖에 안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문재인과 윤석열이 은밀한 커뮤니케이션이 조국에게도 일맥상통했다고 보여진다.

 

민정수석은 실세 권력에선 대통령을 능가한다. 모든 권력기관은 물론 사정기관을 결정한다. 그래서 더욱 무능하고 한심하다.

 

조국과 문재인 그들의 무지한 판단으로 지금 우리가 이 지옥을 맞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에서 은퇴하겠다던 문재인이 요즘 나와서 자신이 옹호했던 윤석열을 극로로 무능하다고 깐다. 그리고 은근슬쩍 조국을 띄우고 있다.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생각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요즘이다. 문재인과 조국 참으로 요사스런 인물들이다.

 

문정권당시 조국사태는 참으로 시끄러웠다. 필자는 그 당시에 이런 컬럼을 썼다. 내용은 이렇다.

 

‘좌·우’로 갈렸던 세상이 제도권이 우선인 ‘울타리 안팎’의 세계로 갈려졌었다. 조국 딸의 ‘논문저자’문제나 ‘표창장 위조’사건 문제에는 좌·우란 개념은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 진보와 보수(통칭 좌파와 우파)의에 들 대립 같지만 결국은 상류층들의 세계, 다시 말해 상위 0.1%정도에 속한 인물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경쟁이다.   

 

즉 울타리 안어선 이들이 사회정의란 이름을 팔아 기득권 쟁탈전을 벌이는 소모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일전에 수차례 열렸던 소위 SKY(스카이)라고 불리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의 ‘조국 딸’에 대한 반대집회도 울타리(제도권)밖의 학생들과는 아무상관이 없는 것이다.우리나라는 ‘SKY급‘ 밖의 학생들이 98%이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도 반 이상이나 된다.

 

 

논문저자니, 표창장이니 하는 단어들은 그들과는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다. 사회적약자인 이들은 항상 구제영역에 위치하나, 정치적으론 관심권 밖의 인물들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다.목소리 또한 내기 힘든 현실이다. 아예 조국사태를 바라보며 참담함속에 울타리 밖에서 거대한 표밭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들을 대변할 만한 사명감이 투철한 정치인의 부재로 인해 늘 외면 받고 소외당하는 그룹일 뿐이다.

 

쿠바의 ’체게바라‘가 그래서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금 번의 조국사태도 상위 1~2%정도 사람들이 사회정의를 가장해 벌였던 그들만의 치열한 기득권 싸움일 뿐이었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학의 거두인 ‘토마 피케티’가 말한 ‘귀족좌파인 ’브라만 좌파‘와 ’부유층 들인 ‘상인 우파’의 대결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지식인과 부유층’들이 벌이는 대결로 상층 울타리 안에서 보호 받고 선택받은 이들이 정치란 제도를 이용해 계층유지와 ‘헤게모니장악’을 위해 벌이는 치열한 공방일 뿐이다.이 현상에는 좌파라 불리는 이들의 본질이 변한 것도 한몫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좌파들은 노동자와 농민 등 거의 저학력과 저소득층이 주류를 이루었고 또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불평등을 배척, 사회제도와 부를 공유하는 게 목적이었다.하지만 1980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진보나 좌파들의 학력이 높아지며 지식인을 위주로 한 계층이 생겨났고 평등을 위한 투쟁정신보다는 그 들만의 가치를 위해 투쟁을 벌이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우리나라 386세대의 등장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상위대학출신의 인물들이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며 진보좌파의 개념을 넘어 제도권 안에서 울타리를 형성, ‘부유우파’들과 철옹성 같은 울타리 안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분명한 것은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투쟁이 아닌 울타리 안에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그 들만의 막강한 힘으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해야하는 정치인들, 그리고 이해관계가 첨예해진 기업들과 생존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철저하게 기생해야 하는 다수의 언론들이 온통 세상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으며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다.기득권의 확보가 최우선인 그들은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사회적 불평등을 선호하게 되며 여럿이 평등하며 다수가 똑똑하고 공정이 우선인 세상은 가급적으로 지양하려하는 것이 본질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은 불평등이고 작금의 우리나라가 꼭 그 짝이다. ‘선각자’가 목마르다.

 

작금 22대 총선이다. 기본사회 5대 정책을 내세우는 어느 정당의 정책이 눈에 들어온다. 대동세상(大同世上)인 것이다. 그 위대했던 동학사상의 맥이 이어지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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