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와 마광수, 두 천재시인을 생각하며!/김동초칼럼


뉴스100 김동초 기자 |

 

 

기형도와 마광수 두 천재시인을 생각하며!!!!!!!!!

 

마광수는 1951년 화성 발안에서 태어났고 기형도는 60년 연평도에서 태어나 광명 소하리에서 삶을 이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후배 기형도는 마광수처럼 연대를 나왔다.

 

기형도는 정치외교과 출신으로 84년부터 중앙일보 정치부와 문화부, 편집부에서 재직했다. 이듬해인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란 시로 당선돼 문단에 데뷔 했다. 유일하게 “입속의 검은 잎“이란 시집을 발표하고 89년 3월 파고다 공원 옆의 동시상영 삼류극장 ”A“에서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년기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엄마걱정, 전문가, 봄날은 간다, 등 그 안에 내재된 막연한 공포와 그리움 등을 쓸쓸하고 가슴 시리게 써내려갔던 천재시인이었다.

 

그리고 마광수는 기형도보다 9년 먼저 태어났다. 화가이며 문인이 었던 그는 2017년 9월초 66세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끊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거대 집단과 권력 속에서 그가 느꼈을 고통과 분노는 가늠조차 안된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 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마광수 역시 천재였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문학성에 있어선 그 천재성을 개인적으론 높이 사고싶다. 

 

 

감히 평하기 어려운 윤동주란 민족 시인에 대해 그 누구 보다 날카로운 해석을 했고 본인과 윤동주시인의 공통점으로 자신에게 솔직했다는 평을 스스로 할 정도의 멋과 배짱도 있었다. 

 

항간에는 마마보이란 설도 있었지만 그래서 더욱더 성에 대한 사고에 대해 그 토록 용감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생전의 설중에 마르크스에 대한 독특한 비평도 있었다.

 

마르크스는 평등을 주장했지만 평등한 자유를 부여하면 자율이 따라야 하는데 마르크스가 간과한 것은 자율에 의한 부분 중 쾌락부분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의 이즘이 완성돼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밀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외설과 예술의 경계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으며 미성년을 15세로 낮추어야 한다는 미래 지향적인 주장도 했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게 들렸다. 마광수의 그런 천재성으로 28세에 홍익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에 발표한 "즐거운 사라", "가자 장미여관으로" 나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 등 기존의 성을 파괴하는 듯 한 연작들이 권위적이며 보수적인 사회의 기득권층과 위협을 느낀 문학계의 쉬레기들로 부터 극심한 저항을 받았다. 같은 학교의 교수였던 자들로 부터도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며 왕따를 당했다.

 

그가 받았을 스트레스와 분노, 그리고 무게를 가늠키 어려운 절망감이 일부라도 느껴져 늦은 나이에 글을 써서 먹고사는 필자도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폐북에 글을 올린 어떤 여류시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그 여류시인도 비슷한 연유로 문학계 기득 권 층으로 부터 당한 따돌림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마광수와 같은 왕따를 당하며 이 땅에 존재하는 문학풍토자체에 강한 환멸을 느낀다고 했다. 어떤 이는 크루스침대를 논하며 그와 했던 술자리를 그리워했다.

 

“문학은 자유다”란 아주 간단한 논리가 가슴을 찌른다.

 

일 전에 헌법재판소장후보로 나서 정치인들부터 심한 곤욕을 치른 김이수재판관이 통진당 사건 때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지며 한말이 있다.

 

“민주주의는 바다와 같아서 모든 실 개천을 받아들인다.” 고했다. “일평생 연애주의”란 시집을 내고 먼저 간 마광수가 그립다. 이놈의 세상은 왜 이렇게 가치와 의미에 대해 잔인 할 정도로 집요하게 멸절을 요구하는 것인가. 울화통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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